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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3회] 율곡을 존경해야 할 4가지 이유 (11/29 ~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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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구의 행복비타민6423회

2022.11.29 (화)

6423.율곡을 존경해야 할 4가지 이유

6423.율곡을 존경해야 할 4가지 이유

첫째, 나라를 목숨보다 사랑한 경세가, 율곡은 뜨거운 심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의 병폐를 고치려고 애썼던 경세가입니다.
율곡이 살았던 조선 시대를 한번 봅시다. 나라는 깊이 병들고 이미 와해된 상태였습니다. 명종 때인 1553년 군적의 실정을 보면 군사 숫자를 맞추려고 엉터리로 채워넣었습니다. 걸인도 넣고, 심지어 닭과 개 이름까지 군적에 올렸습니다. 조정에선 재정의 여력이 없어 장수에게 녹봉을 주지 못했습니다. 녹봉이 없는 장수였지만 권문세가에 줄을 대어 장수가 되려는 사람이 즐비했습니다. 아무 진의 장수 값은 얼마, 아무 보의 벼슬은 얼마 식으로 공공연히 가격이 매겨졌습니다. 돈을 주고 장수 자리를 산 사람은 그 돈보다 더 많은 돈과 양곡을 백성들에게 수탈했습니다. 국가 안보와 직결된 병역이 이런 지경이니 다른 곳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뜨거운 심장을 가진 율곡 선생이 이것을 가만히 보고 계셨겠습니까? 나라의 병폐를 개혁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없이 직언했습니다. 여러 상소 중 3개를 골라 한 대목씩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1569년 선조에게 올린 <옥당진시폐소>라는 상소입니다.

“지금 나라의 형세는 마치 만 칸의 큰 집을 여러 해 동안 손질하지 않는 바람에 옆으로 기울고, 위로는 빗물이 새고, 대들보와 서까래는 좀이 먹어 썩어가고, 단청은 모두 벗겨졌는데 임시방편으로 손을보아 간신히 아침저녁을 넘기고있는 형세와 같습니다.”

율곡의 우국충정에도 병폐는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율곡은 다시 붓을 들어 왕을 질타했습니다. 1574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선조에게 <만언봉사>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우부승지는 오늘날 청와대 수석비서관에 해당하는 요직입니다.

“조선의 상황은 대들보가 심하게 썩어 하루가 다르게 붕괴되어 가는 집과 같습니다.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져 손을 댈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나라의 기반을 보면 이건 나라도 아닙니다(基國非其國).” ‘기국비기국! 이건 나라도 아니다.’ 정말 신랄하지 않습니까?

1582년 선조에게 올린 <만언소>의 비판은 더 날카롭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전복을 당할 운세요, 위태로워 망할 상태에 빠져 있음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러고는 왜 왕이 망할 운세인지 4가지를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당시는 요즘 민주시대와는 달리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시대입니다. 왕은 신하를 멀리 귀양보내려면 보낼수 있고,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습니다. 반역으로 몰아 삼족을 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왕에게 뒤집어질 운세이고 망할 운세라니 율곡은 대체 목숨을 몇 개나 가진 분이십니까? 나라를 위해서라면, 백성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용기를 가진 분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직언입니다.

율곡은 이렇게 나랏일에 진력하다 1584년에 병을 얻어 앓아누웠습니다. 그때 서익이 군사 및 민정 시찰 업무를 띠고 북방으로 가게 되자 율곡을 찾아옵니다. 자제들은 병세가 위중하니 만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율곡은 “이것은 나라의 큰일이니 때를 놓쳐선 안 된다.”면서 동생 이우에게 자신을 부축하게 했습니다. 율곡은 방안에 허리를 세워고 앉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서익에게 '시무육조'의 방책을 일러줍니다.

율곡은 말이 끝나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겨우 소생하더니 이틀 후인 1584년 1월16일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곡을 존경합니다.

둘째, 넓은 가슴을 가진‘큰사람’
율곡은 자신에게 엄하면서도 남은 넓을 가슴으로 포용하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거꾸로 행하지 않습니까?

조선 시대에 당쟁이 심한 것은 다 아시죠? 어느 정도인지 한번 말씀해드리겠습니다. 1583년 율곡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여진족 2만명이 쳐들어왔습니다. 적과 싸우려고 보니 말이 없었습니다. 사안이 워낙 급해 부족한 군마를 조달하는 방안을 먼저 시행하고 나서 왕에게 사후 보고를 했습니다. 또 어느 하루는 율곡이 왕에게 전황을 보고하러 대궐로 가다 갑자기 쓰러져 병조에 눕게 되었습니다. 외적의 침입으로 밤낮으로 군무를 처리하느라 몸이 쇠약해진 것이죠.

이 두 가지가 탄핵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동인들은 왕의 허학도 없이 군마 조달 지시를 내려 권력을 전횡했으며, 왕이 부르는데도 오지 않았다면서 율곡을 삭탈관직하라고 했습니다. 당쟁이 극심하다 보니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죠. 율곡은 아무 죄가 없었지만 조정이 두 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을 막기 위해 관직을 던졌습니다. 그때 낙향한 곳이 화석정이 있는 경기도 파주 율곡리입니다. 율곡이란 호도 본가가 있던 율곡리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율곡이 낙향하자 성균관 학생들과 선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율곡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결국 율곡을 탄핵했던 사람들이 귀양을 가고 율곡은 이조판서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율곡은 자신을 모함했던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왕에게 간청했습니다. 율곡은 “‘동서’ 두 글자는 곧 망국의 화근”이라면서 동인과 서인이 갈라져 배척하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고 생각해 사사로운 감정을 내려놓고 누구보다 화합과 통합에 앞장섰습니다.

“장수의 이마에서는 말을 달릴수 있고 재상의 뱃속에선 배를 저을 수 있어야 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율곡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율곡은 ‘큰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곡을 존경합니다.

셋째, 언행일치한 올곧은 선비
율곡 선생의 얼굴을 보면 단아한 선비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분은 언행이 일치한 올곧은 선비였습니다.

소고기는 요즘에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귀한 음식입니다. 그런데 율곡은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소고기는 율곡의 제사상에도 오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농기계가 없던 옛날에는 소는 농사를 위해 꼭 필요한 동물이었습니다. 소는 논밭을 갈고 수레를 끌고 하루 종일 인간을 위해 헌신합니다. 율곡은 이렇게 헌신하는 소를 잡아먹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살아서는 뼈 빠지게 사람을 위해 고생하고, 그도 모자라 죽어서 고기를 주는 소를 먹는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도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내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으리라.”

그래서 율곡은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제사상에도 소고기가 올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율곡 선생은 동물의 처지까지 헤아리는 선한 분이셨습니다. 보통사람들은 남 앞에서 멋있는 얘기를 해놓고 뒤에서는 몰래 어기지 않습니까? 율곡 선생은 자기가 한 말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도 실천했습니다. 꼼수를 부리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곡을 존경합니다

​넷째, 나눔과 베풂을 실천한 선각자
사실 네 번째가 오늘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입니다. 율곡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율곡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어느 날 최황이라는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밥상이 들어왔어요. 밥 한 그릇에 간장, 나물 반찬 한두 가지가 전부였습니다. 젓가락으로 마땅히 집을 반찬이 없다 보니 최황의 젓가락이 밥상 위를 빙빙 돌기만 했습니다.“이렇게 반찬도 없이 밥을 드셔서 어떡합니까?” 최황이 한 마디 하자 율곡이 말했습니다. “나중에 해가 지고 난 뒤에 먹으면 더 맛있네그려.”

가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청빈(清貧)과 적빈(赤貧)입니다. 적빈은 환경, 능력, 게으름 등에서 비롯된 가난이고, 청빈은 자기가 선택한 자발적 가난을 가리킵니다. 돈을 벌 기회가 있는데도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아 가난하거나 남에게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느라 가난한 것이 청빈입니다. 율곡은 후자 쪽이었습니다.

율곡 선생은 1581년 호조판서 지냈고 1582년에는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그리고 1583년 다시 이조판서를 맡는 등 판서 자리를 4개나 했던 분입니다. 최고의 관직에 오른 분이니 돈을 벌려고 했으면 얼마나 많이 벌 수 있었겠습니까? 율곡은 권력을 이용해 부정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해도 청빈으로 존경받을 일이지요. 율곡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율곡이 가난했던 것은 나라에서 녹봉을 지급하면 가난한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보다 못한 지인들이 율곡의 쌀독에 쌀을 채워주었습니다. 그마저 사람들에게 퍼주다 보니 쌀독이 곧 텅비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율곡은 늘 가난했습니다. 한양에 벼슬살이를 할 때도 집이 없어 세를 살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을 닫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1584년 율곡이 49세의 나이로 눈을 감자 백성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상여가 떠나던 날 백성들이 밝힌 횃불이 수십 리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전합니다.

“집안에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구들이 수의를 빌려 장례를 치른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다.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죽을 때 빈손이라지만 다들 수의 한 벌은 갖고 갑니다. 하지만 율곡은 백성들에게 나눠주느라 그 수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곡을 존경합니다.

오천원권 지폐를 다시 꺼내보십시오. 율곡 선생의 위대성을 아셨다면 율곡의 얼굴이 예전과는 다르게 보이실 것입니다. 율곡 선생을 본받아 여러분도 나누고 베풀어 보십시오. 돈은 소유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나눔의 수단도 됩니다. 소유하면 물질이 풍요하지만 나누면 정신이 풍요해집니다.

인천광역시 계양구 황어로134번길 28  이선구의 행복비타민  |  운영인  이 선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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